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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가창리 용화사에 있는 조선시대 석불입상. 가창리 석불입상은 가창리의 용화사(龍華寺) 뒤편에 지은 보호각 안에 안치되어 있다. 보호각은 김호창이 처음 세웠고, 이후에 퇴락된 것을 지금의 용화사 주지가 개축하였다. 불상은 신체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된 대형 불상에 속한다. 난형(卵形)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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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일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강화최씨의 정려비와 묘문비. 열부 최씨의 본관은 강화이고 이선양의 처이다. 남편이 역질로 병을 얻어 위독하자 최씨는 갖은 정성을 다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이때 최씨는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였음에도 남편이 마침내 운명하였다. 친척과 이웃이 모여 시신을 거둘 때 최씨는 남편이 사용하던 허리끈을 몸에 간직한 후 장례 준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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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 터. 공세동사지에는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과 석불 조상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이곳에 사찰이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이름이나 창건연대의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안양사지(安養寺址)에 대한 기록이 조선 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 『가람고(伽藍考)』,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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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 절터. 어비리 이동저수지에 수몰된 금단사지에 대한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마을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어비리 높은재[금단골]에 금단사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다고 한다. 폐사된 금단사의 유물들을 어비리 주민들이 수습하여 봉안하고 어비울절[금단사지 하단 300m 지점]을 짓고 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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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에 있는 조선시대 표시석. ‘금양(禁養)’이란 ‘풀과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여 숲과 나무를 기르는 일’을 의미하므로 금양계(禁養界) 표석은 땔감 채취 등을 금지하는 구역임을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구역의 범위도 명기되어 있다. 머리 부분이 둥글게 처리된 원수형(圓首形) 비석으로 장방형 대리석제 받침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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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의 열부. 본관은 남양. 홍락원(洪落源)의 딸로 태어났다.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집(金鏶)의 손자 김상동(金相東)의 처이다. 남편이 병을 얻어 지성으로 간병했으나 자리에 누운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남편의 죽음에도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늙은 시모를 위안하고 진정시키기에 애를 썼다. 망부를 장례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수의를 손수 마르고 꿰매어 입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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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용인 출신의 효자. 김상익은 향리에서 글방을 차려 훈장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좌수의 직책을 맡아 향치에 힘썼다. 평소 효심이 두터웠기로 마을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중 부친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몸소 탕약을 끓여 간병하였고, 천수를 다하자 멸성지정(滅性之情)으로 애도하였다. 예에 어긋남이 없이 장례를 마친 후 3년의 거상 중에 하루도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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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에 있는 조선 후기 김상익의 효자비. 양지면 제일리 마을 입구 도로변 오른쪽에 남서향(南西向)으로 세워져 있다. 김상익의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행과 언행을 마을 사람들이 사표로 삼을 수 있도록 마을 입구에 세워졌다. 시멘트 기단 위에 비좌와 비신 및 팔작지붕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백색 대리석제에 황색 운모가 혼입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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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풍.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육(金堉)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되었으며,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전적이 된 후 이조좌랑·정언·지평·부교리·수찬·헌납·교리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674년 겸보덕(兼輔德)에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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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동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김영희의 정려각. 김영희의 본관은 경주로, 조선 후기인 1826년(순조 26)에 경기도 광주시 야곡에서 태어났다. 15세 때인 1840년에 용인현 남동마을로 이사하여 살았다. 가세가 몹시 곤궁하였으나 정성을 다해 양친을 부양하였다. 34세 되던 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이 별세하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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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수보. 아버지는 진사 김구(金龜)이다. 김집은 가난하였지만 부모를 섬기는 일에 성심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을 앓자 변을 맛보아 징험하고 엉킨 머리에서 이가 떠나게 하였다. 어머니가 꿩을 먹고 싶다고 하자 부엌에 들어가 꿩을 잡았고, 아버지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을 깨고 이를 구해 공양했다. 마침내 상을 당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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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매능동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김치복의 정려각. 김치복 효자정려각(金致福 孝子旌閭閣)은 조선 후기인 1831년(순조 31)에 명정된 김치복 효자정려문부터 1860년(철종 11)에 명정된 권씨 효부정려문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의성김씨 일문에서 나온 효자·열녀·효부인 김치복 효자정려문, 황씨 열녀정려문, 권씨 효부정려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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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에 있는 조선 전기 학자 이석지의 재실. 초창은 조선 전기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서 다시 세웠다. 종도리 장여에 기록된 상량문을 보면 “단기사천이백구십년정유오월십사일입주동월십팔일무오오시상량간좌(檀紀四千二百九十年丁酉五月十四日立柱仝月十八日戊午午時上樑艮坐)”라고 되어 있어 1957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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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남구만의 사당. 남구만이 만년에 살았던 고택이 있던 곳으로, 현재 그의 별묘 겸 영당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남구만은 종묘의 숙종 묘에 배향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구만은 강릉으로 유배를 갔다가 1년여 만에 유배가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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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윤섬과 윤계의 사당. 남원윤씨 사당은 1587년(선조 20) 종계 변무 사건 때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가 『개정보전(改正寶典)』을 받아온 공으로 수기광국공신(修記光國功臣)으로 책록된 윤섬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그의 손자 윤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사당은 정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칸에는 윤섬의 신위가 봉안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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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현령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문화. 자는 계창(季昌), 호는 만암(晩菴). 영의정을 지낸 류상운(柳尙運)의 아들이다. 1697년(숙종 23) 과거에 합격하였다가 그 부친이 고시를 주관하면서 아들을 급제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삭과되었다가 1699년 다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첫 부임지인 용인현에서 재임기간 동안 선치하여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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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정비군. 송덕비군이 있는 마북동 일대는 용인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 과거 읍치였던 곳에는 행정의 중심인 관아가 있고, 관아를 중심으로 수령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 군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북동 송덕비군 역시 이런 일반적인 경우이다. 총 14기로 현령 등의 선정 송덕비 10기, 군수 선정비 1기,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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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리 용화전에 있는 조선시대 석불입상. 불상은 직육면체의 몸통에 높은 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장방형으로 턱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눈은 크게 치켜뜨고 있으며, 코는 크고 오뚝하게 부각시켰으며, 입은 꼭 다물고 있다. 얼굴에는 볼륨감이 전혀 없고 석인상의 엄격성과 근엄성이 강조되고 있다. 수인(手印)은 복부 부근에서 두 손을 모아 보주 내지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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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목원규의 정려각. 목원규의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자는 문유(文有)이다. 1828년(순조 28)에 용인에서 목우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칭송을 들었다. 그가 별세한 지 18년 만인 1891년(고종 28)에 동몽교관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로 증직하여 이듬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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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문수봉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문수사지에 대한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고, 19세기경의 문헌 기록에서 폐사 후 잔존한 모습만을 전하고 있다. 『사탑고적고』에는 “문수사지 등으로 전하며 초석 수개만 남아 있다”라 기록되었고, 『기내사원지』 등에도 유사하게 설명되어 있다. 산봉우리 이름이 ‘문수(文殊)’라는 불교적 지명이고,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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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 있는 고려 전기 마애보살상 2구. 문수사지는 원삼면 문촌리 문수산에 있으며, 지금은 우물과 맷돌 자국이 있는 자연암반, 건물지만이 남아 있는 옛 절터이다. 마애보살상은 문수사지에서 북서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약 50m 정도 오르면 있다. 이곳에는 남쪽을 향해 ㄱ자형의 단애(斷崖)가 형성되어 있는데, 마애보살상은 단애의 서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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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미평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미평리사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1900년대 초에 작성된 『사탑고적고』로, “석불입상은 그 분지에 매몰되어 있는데 지상에 노출된 높이는 12척 5촌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절의 명칭이나 폐사 시기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 명확하지는 않지만 석불이 잔존하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평지형 사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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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 절터. 양지에서 국도 17호선으로 백암을 지나가다 원대에서 동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가면 박곡리에 이른다. 절터는 마을 동편 대덕산 서쪽 사면에 해당하는 오방낭골의 구릉 평지에 있다. 2011년 현재 주민들이 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고적총람(古蹟總覽)』·『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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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의 열녀. 본관은 연안. 아버지는 이형원, 남편은 박래영이다. 1785년(정조 9)에 출생하여 16세 때에 박래영과 결혼하였다. 그때 시어머니는 이미 작고하였고, 홀시아버지는 병환으로 문밖출입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7년 동안 극진히 간병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났고, 병약하던 남편마저 24세 되던 해인 1809년(순조 9)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멸성지정으로 애통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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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박인영의 정려각. 박인영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여안(汝安)으로 박민흥(朴敏興)의 아들이다. 1750년(영조 26)에 옥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재덕을 겸비하여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효행은 근천지효(根天之孝), 격천지성(格天之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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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 백련사는 통일신라시대 801년(애장왕 2)에 신응선사(愼應禪師)가 암자를 지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 후기 1389년(공양왕 1)에 승려 천공(泉公)이 절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무학대사는 이곳 백련암에 18나한상을 조성하고 절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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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백련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나한을 모신 법당. 나한이란 원래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며, 부처로부터 아라한이라는 과일을 얻은 불제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소승 교법을 수행하는 가장 윗자리를 가리키는 말로서 대승불교의 부처와 같은 경지이다. 나한도량은 부처의 제자 1,255명의 아라한을 상징하며, 18위를 모실 때 18나한전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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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백련사 나한전에 있는 조선시대 나한상. 우리나라에서 나한 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고려시대부터 널리 신앙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광통보제사의 정전을 나한 보전이라 하고, 석가모니와 문수, 보현보살의 삼존과 함께 500나한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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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백련사에 있는 조선 후기 지불(紙佛)좌상. 동안의 얼굴은 살이 찐 편이고 머리에는 굵고 큼직한 나발을 부착하였으며, 머리의 중앙에는 계주가 있다. 미간에는 큼직한 백호가 돌출되어 있으며,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꼭 다문 입술은 작고 앙증맞으며, 귀는 단정하다. 대의(大衣)는 이중 착의를 하였고 가슴은 방형으로 크게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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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백련사 나한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목불좌상. 백련사 나한전에는 목불좌상 1구를 포함해, 지불좌상 1구, 석조나한상 16구 등이 안치되어 있다. 백련사 목불좌상은 높이가 40㎝ 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불상으로, 양손을 단정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얼굴은 동안형(童顔形)이며, 머리에는 낮게 퍼진 반월형의 중앙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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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백련사에 있는 고려시대 석조불두. 현재 백련사 석조불좌상과 함께 놓여져 있다. 신체는 파손되어 그 상태를 알 수 없고 불두만이 남아 있다. 불두는 크게 훼손되어 완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고, 정면과 좌우 측면에는 세밀하게 조각된 나발이 남아 있다. 현고는 12.2㎝, 폭 9.6㎝, 두께 7.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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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백련사에 있는 고려시대 석조불. 나발의 머리 위에 낮은 육계가 있는데 마모가 심하고, 이마에는 백호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상호는 둥글고 풍만하지만 긴장감이 결여된 모습이다. 귀와 코는 파손되었고, 두터운 입술은 약간 벌리고 있는 듯하다. 가슴 위쪽에 삼도(三道)가 형식적으로 음각되어 있는데, 삼도가 이렇게 가슴 부분에 표현된 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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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백련사 부지에 있는 조선 후기 부도와 탑비. 백련사 경내에서 100m 정도 떨어진 북쪽 위치에 석종형 부도와 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부도는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종형(石鐘型) 부도로, 탑신부(塔身部)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어 소박하다. 사각의 지대석(地臺石) 중심에 원형의 홈을 파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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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백련암의 유래와 경계 지역, 중수 내용을 기록한 문서. 반곽의 크기는 32x22㎝ 정도이며 우철 5정침으로 제본되어 있다. 표지에는 “향수산백련암약사(香秀山白蓮菴略史)”라 기록되어 있으나 ‘향수산’이란 글씨만 희미하게 보일 뿐 나머지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면수는 6면이며 장수는 3엽이고 글씨는 행서의 필사본이다. 기록의 서두에는 백련암이 위치한 산명, 암자 명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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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백봉리사지에는 3층석탑과 석불 및 주초석 등이 남아 있었으나 석탑 등은 1983년에 대은사가 창건되면서 옮겨졌다. 현재 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과수원은 삭토되어 건물이 들어서 있고, 주변 단애 면에서 고려시대의 기와편과 자기편이 깨어진 채 발견되었다. 사지의 중심부와 그 주변이 암반층까지 깎여 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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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백봉리 대은사에 있는 고려 전기의 탑재. 이 지역 주민들이 잣나무골이라 부르는 곳에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가 있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지와 함께 불상과 대좌(臺座), 탑재, 초석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와편(瓦片)이 산재하고 있어 과거에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근래 들어 대은사(大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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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선돌. 용인에서 양지인터체인지 방향으로 지방도 57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이정표가 있고, 사암리 안골 입구에 들어서면 선돌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1호, 2호, 3호로 명명하여 각각의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호는 높이 220㎝, 너비 103㎝, 두께 60㎝이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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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두암산에 있는 조선 전기 정자.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정암 조광조,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음애 이자 등이 모여 학문을 논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을 사은(四隱)이라 한 것은 정암, 방은, 회곡, 음애가 서로 친하게 지내며 도의(道義)로써 사귀어 더불어 즐거워하고, 농사 짓고[耕], 나무하고[薪], 낚시질하며[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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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태종실록』 7년(1407년) 12월 2일조에 따르면 용구(龍駒)[용인] 서봉사를 전국적인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시행된 사찰의 혁파 대상에서 제외된 거찰(巨刹)로서, ‘명찰(名刹)’ 또는 ‘명당 터의 대가람’에 해당하는 절이었다. 그 후 1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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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야성. 자는 희주(希周). 양지현(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서 출생하여 천성이 지효하였다. 부친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조석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행여 방이 찰세라 군불을 지펴 따뜻하게 하였으며, 하인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손수 하였다. 부친의 환우 중에는 험한 고개를 넘어 20여 리나 되는 다른 동네에 피접처를 정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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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송지렴의 정문(旌門) 및 정려각. 송지렴의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희주(希周)로 송표의 아들이다. 1769년(영조 45)에 양지현에서 태어났다. 가업인 의술을 이어받아 명의로 이름을 남겼다. 효성이 지극한 것을 사림이 상소하여 효자정문이 내려지고 송문리에 정려각을 세웠다. 정려각은 정면 3칸,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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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의 해주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오씨 문중의 종계첩. 『수양종첩(首陽宗帖)』은 해주를 본관으로 하는 해주오씨 문중의 종계첩(宗禊帖)으로, 『수양종계첩(首陽宗禊帖)』으로도 부른다. 『수양종첩(首陽宗帖)』이라 부른 것은 해주오씨를 수양오씨라고도 부르기 때문이다. 1766년(영조 42) 영의정으로 증직된 감역공(監役公) 오희문(吳希文)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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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열부 순흥안씨의 정려각. 효열부 안씨의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안정록(安莛祿)의 딸로, 1834년(순조 34)에 태어났다. 안동권씨 권석기와 결혼하였다. 시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바느질과 길쌈을 하면서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24살 되던 해 남편을 잃게 되자 지아비를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늙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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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재가 지은 심곡서원의 규칙서. 「도암 이재 학규」로도 불리는 「심곡서원 학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재(李縡)[1680~1746]가 지은 심곡서원의 규칙서이다. 현재 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 강당에 현액되어 있다. 심곡서원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조선 중기인 1650년(효종 1) 사액(賜額)된 서원으로,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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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심대의 정려각. 심대의 본관은 청송으로 자는 공망(公望)이며, 호는 서돈(西敦),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46년(명종 1)에 태어났으며 1572년(선조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경기감사로 어가를 수행하여 공을 세웠다. 호성(扈聖) 공신에 녹훈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청원부원군(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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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심대의 묘. 심대(沈岱)[1546~1592]의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敦),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징(權徵)의 후임으로 경기관찰사를 제수받고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이후 심대는 서울 탈환을 위해 남하하다가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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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현령을 역임한 문신. 심존지는 1819년(순조 19) 9월 21일 용인현령으로 부임하여 1820년 2월 29일까지 용인현령을 지냈다. 담양부사로 있을 때인 1829년(순조 29) 전라좌도 암행어사 유성환(兪星煥)이 잘 다스렸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을 받았다. 용인현 백성들은 현령으로 재직할 때의 공덕을 기려 선정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지금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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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안기명의 정려각. 안기명의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함안군수 안익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환으로 눕자 한겨울에도 한강까지 나아가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공양하였으며, 한밤중에 산중에 올라가 기도할 때는 호랑이가 감복하여 보호하였다고 한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묘소를 보살피자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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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묘봉리에 있는 조선 중기 안홍국의 정려각. 안홍국은 조선 중기 무인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신경(藎卿),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1583년(선조 1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순신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중 보성군수로 안골포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1642년(인조 20)에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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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안희중의 정려각. 안희중의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1728년(영조 4)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는데, 그가 15살 되던 해에 폭우로 사당이 무너져 내리자 들보를 받쳐 들어 신주를 온전히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1750년(영조 26) 조부가 병환에 들자 반 년 동안 간병하였다. 어느 날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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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송전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함종어씨 정려각. 함종어씨 문중의 어진혁(魚震赫), 어사량(魚史良), 어운해(魚運海) 등 3대에 걸친 효자 정려각이다. 1864년(고종 1)에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다. 그 후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효자로 명정(命旌)되었다. 용인에서 국도 45호선로 이동저수지로 가다 송전에서 국도 82호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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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있는 조선 중기 연안부부인 전씨의 묘. 연안부부인 전씨(田氏)는 성종의 장모이자 중종의 외할머니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부인이다. 윤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인 1462(세조 8)년 6월 26일 낳은 딸이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본래 성종의 비는 한명회의 딸이었으나 19살로 요절하였고, 뒤를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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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열녀 연안이씨의 정려각. 연안이씨는 이형원의 딸로, 16살 때 박래영과 결혼하였는데, 시어머니는 이미 작고하였고, 시아버지는 병환으로 문밖 출입도 못하고 있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7년여 동안 극진히 간병하였으나 시아버지는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남편 박래영도 병약하여 24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자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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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조선 중기에 건립된 정몽주 묘소의 재실. 영모재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들이 묘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이러한 용도의 건물을 재실(齋室), 또는 재사(齋舍)라고 하는데, 제사에 참여하는 후손들의 음복(飮福)과 망제(望祭), 숙식 제공, 제사에 필요한 각종 물건의 보관, 제사 음식의 관리 등이 주요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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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의 해주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중기 오희문의 일기집. 『쇄미록(瑣尾録)』은 조선 중기에 선공감 감역을 지낸 비연(斐然)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으로 피난하며 10여 년간 쓴 일기이다. 1991년 9월 30일에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다. 오희문이 난리 중에도 이와 같은 글을 남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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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용덕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여래상. 천리 석조여래입상은 원래 이동읍 천리 적동저수지 입구 저수지 하단 제방에 있었다. 1960년대 초 적동저수지 축조 공사를 시작하면서 저수지 입구 왼쪽으로 옮겨 정면 1칸의 당우(堂宇)에 안치했었다. 이후에 다시 용덕사로 이전되어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으로도 불린다. 용덕사로 옮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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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있는 고려 후기의 탑비. 서봉사 현오국사탑비는 용인의 불교문화 유적으로, 서봉사의 사지(寺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편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봉사는 1185년(명종 15) 현오국사(玄悟國師) 종린(宗璘)의 비(碑)가 세워지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서봉사 현오국사탑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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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조광조를 모신 서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심곡서원은 1650년(효종 원년)에 ‘심곡(深谷)’이라는 사액현판과 토지와 노비 등을 임금에게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이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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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통 가옥. ‘용인 전 음애이자 고택(龍仁 傳 陰崖李耔古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알려진 음애공 이자(李耔)가 살던 집이라고 전하는 전통가옥이다. 고택 좌측에는 근래에 건립된 ‘효문의공부조지묘(孝文懿公不祧之廟)’의 현판이 걸린 사당이 동향하여 있고, 고택에서 동북쪽으로 도로를 건너 지곡동 달래울 신갈승마클럽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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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에 있는 고려시대 오층석탑. 1층 옥신석을 제외한 나머지 탑신은 아주 낮게 이루어져 있으며, 3층은 옥신과 옥개가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어 이곳에 사리장치(舍利藏置)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은 4단의 층급 받침이 확연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처마선도 직선으로 강건한 맛이 느껴지도록 치석되었다. 옥개석 모서리 처마 부분[轉角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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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오윤겸의 재실. 1636년(인조 14)에 오윤겸이 별세하자 모현촌에서 장사를 지내고 묘소 아래에 재실과 사당을 지었다. 재실은 후손들이 조상의 묘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이러한 용도의 건물을 재실(齋室), 또는 재사(齋舍)라고 하는데, 제사에 참여하는 후손들의 음복(飮福)과 망제(望祭), 숙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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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에 있는 조선시대 충신 유복립의 정려각. 유복립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이다. 1558년(명종 13)에 출생하여, 종부시주부(宗簿侍主簿)로 관도에 올랐다. 유복립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의병장 김천일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1719년(숙종 45) 대종백(大宗伯) 민진후(閔鎭厚)의 주청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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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문인으로서 무인을 능가하는 무예를 가지고 있었다. 야인(野人)을 정벌하여 정세를 편안히 하였으며, 중종의 즉위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이과(李顆)의 옥사를 다스려서는 정난공신(定難功臣)에 추대되었다. 또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토벌한 공으로 영의정에 오르기도 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 증조부는 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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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기계. 자는 사호(士鎬), 호는 대재(大齋)이다.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유일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 자의(諮議)가 되었다. 그 후 사헌부 지평, 집의, 경연관 등을 역임하였고, 이조·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돈녕부도정에 이르렀다가 사직한 후 안성에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782년(정조 6)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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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반정공신이자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연(子淵). 증조부는 부지돈녕부사 유자해(柳子偕), 할아버지는 광주목사 유양(柳壤),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 유순정(柳順汀), 어머니는 별좌 권효충(權孝忠)의 딸이다. 딸은 중종과 숙원홍씨(淑媛洪氏) 사이에서 태어난 해안군(海安君) 이희에게 출가하였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1506년의 중종반정 당시 이를 주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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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청덕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신 윤섬과 그 손자 윤계의 정려문. 윤섬의 본관은 남원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다. 1583년(선조 16)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거쳤으며, 1587년(선조 20)에 조선 왕실의 세계(世系)가 명나라에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은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공을 세워 수기광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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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운(啓運). 아버지는 이기남(李起南)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이계복은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것을 지성으로 하여, 부모님이 병이 들면 항상 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였으며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아버지가 학질에 걸렸을 때, 어떤 이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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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이계복의 정려각. 이계복의 자는 계운(啓運)으로, 어려서부터 오직 어버이 섬기는 것을 일로 삼아 몸소 살펴 불편함이 없게 하였다. 부친이 학질에 걸려 위독하던 중, 사람 고기를 먹어야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신의 다리 살점을 베어 부친의 병환을 고쳤다고 전한다. 백암면을 지나는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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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 상산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이규헌의 정려각. 이규헌[1669~1731]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1669년에 좌승지 이진하(李鎭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균진사를 거쳐 37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이 해에 부친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장남의 도리를 저버릴 수 없다 하여 형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관직을 사퇴한 뒤 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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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1363~1414]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396년 태조의 8남 5녀 중 맏딸인 경신공주(慶愼公主)[?~1426]와 혼인하여 상당군(上黨君)과 상당후(上黨候)가 되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아명은 백경(伯卿). 초명은 이저(李佇). 아버지는 청허자(淸虛子) 이거이(李居易)이며, 청평부원군에 봉하여졌다가 공신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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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독정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이찬조의 정려각. 이찬조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1584년에 용인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별천선전관(別薦宣傳官)이 되어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송하였다. 1636년에는 의병을 이끌고 지금의 성남시 세곡동 일원에서 청군과 맞서 싸우다 생포되었다. 청태종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항복하지 않고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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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 장경사에 있는 조선 후기 석조보살상. 머리에 두건(頭巾)을 쓰고 있어 도상적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추정된다. 얼굴은 동안으로 볼에 살이 올라 있으며, 조그마한 입에는 옅은 미소가 엿보인다. 착의는 보살상 특유의 천의가 아니라 불의형(佛衣形) 대의(大衣)를 이중으로 걸쳐 입은 이중 착의법(二重着衣法)을 취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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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 출신의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 충, 효, 열행을 표창하기 위하여 정문을 내리는 국가의 특전을 작설지전(綽楔之典)이라고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전편」을 보면, “절의와 선행이 있는 자는 장권한다. 효자와 조부모의 봉양에 성심을 다한 손순(遜順), 절부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우애와 화목을 지켜 칭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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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 병조판서 정옥형(丁玉亨)의 손자이고, 좌찬성 정응두(丁應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어 예조좌랑·수찬·집의·우승지·대사성·부제학·도승지·병조판서·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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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효자. 조선 선조 때 출생하였고, 관직은 전력부위(展力副尉)에 올랐다. 부친이 병을 얻었을 때 동짓달에 생대추가 먹고 싶다고 하자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며 축원하였더니 이튿날 아침에 생대추가 붉기 시작하였고, 또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찾아 가는 길에 꿩의 무리 중 한 마리가 높이 날아 올라갔다가 그 앞에 떨어졌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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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묘봉리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정응규의 정려문. 처인구 이동읍 하리저수지 동쪽에 위치한 묘봉리 중리마을 뒤편 구릉에 동남향으로 서 있다. 정응규(鄭應虯)는 부친이 병이 들어 동짓달에 생대추를 먹고 싶어하자 하늘에 울면서 축원하여 생대추를 얻는 등 효성이 지극하여 영조 때에 효자로 정려되었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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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의 공덕을 기리는 뇌문비. 채제공 뇌문비는 처인구 역북동 낙은마을 채제공의 묘역 입구 산기슭에서 북서향 방향에 있는 비각 내에 보존되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백색 화강암제 비좌와 흑요색의 비신으로 이루어진 비는 팔작지붕에 옥개석 형태이다. 비신 상부의 전액(篆額)은 “어제뢰문(御製誄文)”이며, 본문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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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조선 말기 정한영의 효자비. 정한영(鄭漢永)은 정몽주의 19대손인 정구현(鄭九鉉)의 아들로, 조선 말기인 1862년에 태어났다. 벼슬은 종사량(從仕良)으로 감리서주사를 지냈다. 성품이 바르고 총명하였으며, 평소 정성을 다해 부모를 섬기어 인근에 효자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정한영은 평소 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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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조사의 사당. 조사(趙師)의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가천재(嘉川齋)로 태조의 생질이다. 태조가 조선 개국 후 중추부사를 제수하였으나, 고려 공양왕 밑에서 벼슬한 일을 내세워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양양(襄陽)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죽기 전에 후손에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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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는 최유경을 비롯한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의 전주최씨 묘역. 최유경(崔有慶)[1343~1413]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1392년 이성계를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1393년 축성도감이 되어 한양성을 축성하였다. 최유경은 태조 이성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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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고려시대 군사 시설 터. 처인군창은 고려시대에 처인성에 딸린 창고로 건축되었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용인현편 고적조(古蹟條)의 기록을 보면 “현의 남쪽 25리에 토축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퇴폐되었다. 군창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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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고려 후기 처인성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비. 고려 후기인 1232년(고종 10)에 처인성은 군창이 있던 지역으로, 전체 면적이 5,820평이고, 둘레가 425미터의 작은 토성이었다. 이 토성에서 세계를 제패한 몽고의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가 보잘것없는 고려의 승병장 김윤후가 이끄는 의병대와 일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원정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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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에서 출토된 청동검의 거푸집. 1965년 마을 주민이 3점의 청동검 거푸집[鎔范]을 발견해 매장문화재로 신고하였다. 3점의 청동검 거푸집은 모두 활석으로 만들었으며, 그 중 2매는 서로 짝을 이루고, 그 뒷면에도 틀을 갖추고 있어 여기에 다른 용범을 붙여 사용하면 한꺼번에 여러 개의 청동검을 생산할 수 있는 구조이다. 나머지 하나는 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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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서원. 충렬서원은 고려 후기의 충신이자 동방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중기인 1576년(선조 9)에 지은 서원 건물이다. 그후 마을 이름도 충신을 사모한다고 해서 ‘모현면[현 모현읍]’으로, 정몽주의 묘소와 서원이 있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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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충렬서원 역대 원장을 기록한 책첩. 충렬서원은 고려 말기의 문신 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배향한 서원으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다.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1년에 복원되었다. 『충렬서원 선생안(忠烈書院 先生案)』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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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정명한이 충렬서원의 강당과 사당 등을 중수한 내용을 기록한 부책. 충렬서원(忠烈書院)은 고려 말기의 문신 정몽주(鄭夢周)[1337~1392]를 배향한 서원으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다. 1576년(선조 9)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에 경기도관찰사로 있던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현감 정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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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에 있는 조선 중기 의병장 유복립의 재실. 충모재는 조선 중기의 의병장인 묵계(墨溪) 유복립(柳復立)[1558~1593]의 제향을 받드는 재실이다. 유복립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등과 순절하여 후에 충신정려문이 내려졌다. 정려문은 송문리 동구의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양지면 송문리를 지나는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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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북리 당하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경종지의 사당. 본관이 청주(淸州)인 경종지(慶宗智)는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1604년(선조 37)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3등으로 녹선되고 공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양성군으로 봉해졌다. 당시 부인 순흥안씨에게는 정경부인의 첩지가 내려졌다. 원래 사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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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상징이요,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되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천군 동우항리이다. 포은 선생의 어머니는 영천이씨인데, 임신 중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려 깜짝 놀란 꿈을 꾸고 나서 낳은 아이라고 하여 처음에는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포은 선생이 아홉 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영천이씨가 낮잠을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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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배출된 충신, 효자·효부 그리고 열부·열녀들. 충효열이란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녀자가 지조를 지켜 남편을 따라 순절하는 행실을 통칭한 것으로 이를 삼강행실이라고 하였으며 유교 이념의 기본 덕목이다. 충(忠)은 삼강행실의 첫 번째 덕목이다. 용인의 대표적 인물은 포은 정몽주이다. 그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충의백(忠毅伯)으로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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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고려 후기의 문신인 정몽주 종택의 사당. 포은선생영당(圃隱先生影堂)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종택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후기인 1679년(숙종 5)에 처음 지어졌다. 영당이란 원래 이름난 이의 화상이나 조각상을 모시어 둔 사당을 말한다. 포은선생영당에서는 음력 4월 4일에 포은 선생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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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독성리 중대마을에 있는 조선 전기 효자 한구의 정려각. 한구(韓逑)[1376~1447]의 본관은 광주로, 다섯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장성하여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에 두 분을 합장하고 광주의 여막에서 육 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몸소 상식을 올렸으며, 혹 사람과 더불어 말할 때라도 이가 드러나지 않았고, 상기를 마칠 때까지 한 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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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기호 지역에서 일어난 심성(心性)에 관한 학설 논쟁.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라고도 한다. 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 등을 지지한 이들이 충청·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살았으므로 호론(湖論)이라 하며,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이재(李縡)를 지지한 이들은 서울·경기 낙하(洛下) 지역에 주로 살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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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있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 절터. 마북동 구성초등학교 진입로 부근 도로변 빌딩자리에 위치한다. 바로 앞에 역대 용인 지방관들의 송덕비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용인현 관아와 인접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용화전(龍華殿)이란 전각에 석불입상이 안치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이 곳을 용화사지로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문헌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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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최유경의 사당.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1343~1413]은 효성과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아 태종 때에는 청백리로 녹선되고, 세종 때에는 효자정문이 내려졌다. 이곳에 소재한 사우(祠宇)를 효렴사(孝廉祠)라 한 것은 그의 청렴한 기상과 효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방도 393호선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