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굴 기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858
한자 -修行窟記文-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45년 - 조귀상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64년연표보기 - 조귀상 「수행굴 기문」 저술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12년 - 조귀상 사망
성격 기문
작가 조귀상

[정의]

조선 후기 조귀상이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마이산 수행굴을 다녀와서 지은 기문.

[개설]

유현재(猶賢齋) 조귀상(趙龜祥)[1645~1712]은 선산 부사(善山府使)와 무주 부사(茂朱府使)를 지냈다. 문집으로는 『유현재집(猶賢齋集)』 2권이 있다. 조귀상이 선산 부사 시절에 선산의 양가 규수인 향냥(香娘)이 남편에게 핍박받고 숙부에게 개가를 강요당하자 연못에 빠져 죽은 일화를 『향냥전(香娘傳)』으로 지어 조정으로부터 정문(旌門)이 세워지도록 한 일은 매우 유명하다.

『진안 군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기문은 시 2수와 함께 1664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귀상이 어떤 경위로 마이산을 방문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시구 중에 “우연가회속운림(偶然佳會屬雲林)”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이산 근처에서 어떤 모임을 가지게 되어 마이산에 올라 수행굴을 찾아보고 기문을 지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내용]

「수행굴 기문」에는 수행굴의 옛 모습이 수필체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또 마이산의 다른 이름인 용출산을 들어 마이산의 웅장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1. 번역문

옛날부터 속금산[마이산] 허리춤에 석벽이 있는데 그 높이는 백여 척이다. 그 중앙은 갈라져 굴이 되었다.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굴속에 두 칸의 집이 있고 단청은 벗겨졌는데 어느 때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한 칸은 방인데 방의 네 벽과 창문은 모두 천연적으로 만들어져 조탁은 하지 않았다. 한 칸은 마루 난간인데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높은 난간이 아득하여 만학천봉을 볼 수 있는데 그 아래는 몇 길이나 되는지 굽어볼 수가 없다. 이것들은 모두 진안현 남쪽 마이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마이산의 형상은 석봉이 솟아올라 깎아 세운 듯 두 산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만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말귀 같은 모양이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더러는 용출산이라고도 부른다. 산중에는 기록할 만한 곳이 수도 없이 많은데 유독 이 석굴에 대하여 기록하는 것은 그 기이한 절경이 호남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원문

고금지하산요(古金支下山腰)/ 유석벽고백여척(有石壁高百餘尺)/ 중앙절이위굴(中央折以爲窟)/ 반기목잔이상(攀其木棧而上)/ 칙굴중유옥이간(則窟中有屋二間)/ 단청박락(丹靑剝落)/ 부지창어하대(不知創於何代)/ 일간위방(一間爲房)/ 방칙사벽여창호(房則四壁與窓戶)/ 개잉천작별조탁(皆仍天作別雕啄)/ 일간위헌(一間爲軒)/ 헌칙인력소위야(軒則人力所爲也)/ 위란표묘(危欄飄渺)/ 임호만학지상(臨乎萬壑之上)/ 기하부지기장(其下不知幾丈)/ 불능부시의(不能俯視矣)/ 우등처개재진안현지남(右等處皆在鎭安縣之南)/ 마이산지록(馬耳山之麓)/ 마이산형(馬耳山形)/ 석봉용출(石峰湧出)/ 삭립쌍준(削立雙蹲)/ 기고부지기만인(其高不知幾萬仞)/ 이형여마이(而形如馬耳)/ 고이시위호(故以是爲號)/ 혹위용출산(或謂湧出山)/ 산중가기가록지처무수(山中可記可錄之處無數)/ 이독어차굴위기자(而獨於此屈爲記者)/ 위기기절(爲其奇絶)/ 가관호남고야(可冠湖南故也)

[특징]

수행굴금당사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사실적 필치로 묘사하여 일대의 형승을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금당사를 복원하는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당시 마이산의 다른 이름이 용출산이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수행굴과 사라진 옛 금당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문이다. 마이산 기문과 그 시가 많음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귀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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