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847
한자 美溪愼義連遺蹟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노길 117[노촌리 67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영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46년 - 신의련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06년 - 신의련 사망
건립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미계 신의련 유적비 건립
현 소재지 미계 신의련 유적비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노길 109|117[노촌리 671]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신의련
크기(높이,너비,두께) 180㎝[높이]|59㎝[폭]|34㎝[두께]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 어귀에 있는 신의련의 유적비.

[개설]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에 있는 미계 신의련 유적비신의련의 유적을 기념하기 위해 1907년에 건립되었다. 신의련(愼義連)[1546~1606]의 자는 의숙(宜叔), 호는 미계(美溪), 본관은 거창으로 양렬공(襄烈公) 신이충(愼以衷)의 7대손이다.

[건립 경위]

미계 신의련의 효열을 기르기 위해 1856년(철종 7)에 신의련의 7대 후손 노은(蘆隱) 신영구(愼榮九)[1800~1880]가 사림과 더불어 영모정충효사를 지었다. 이어 1907년에는 신의련의 효열이 마을을 지켰음을 기념하기 위해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 어귀에 미계 신의련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미계 신의련 유적비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 어귀에 위치해 있다.

[형태]

신의련 유적비는 기단인 비대석, 비신, 가첨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의 높이 180㎝, 폭 59㎝, 두께 34㎝이다.

[금석문]

비석 표면에는 “미계 신선생 의련 유적비(美溪愼先生義連遺蹟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 뒷면에는 신기선(申箕善)이 지은 명(銘)이 있다. 비명에는 신의련의 효성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신의련임진왜란 때 병든 부모를 모시고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적이 부친을 죽이려 하자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 대신 죽기를 빌었다. 이에 왜장이 신의련의 효성에 감동하여 동구 밖에 방을 붙여서 효자가 사는 곳이라 하여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신의련 덕분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5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네의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고, 그 들판은 화를 면한 곳이라 하여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산은 덕태산(德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신의련에게 수의 부위(修義副尉)의 품계와 정려가 내려졌다. 1801년(순조 1)에 신의련의 효성을 기념하여 신의련 효자각을 세웠는데 건물은 기와 팔작지붕이다.

[현황]

미계 신의련 유적비원노촌[갈거리] 남서쪽 신의련 효자문 옆에 있다. 이 유적비는 신의련를 제향한 충효사, 신의련의 효성을 기념한 신의련 효자각 등과 함께 거창 신씨가 관리하고 있다. 원노촌 마을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의의와 평가]

신의련 유적비가 있는 원노(元蘆) 마을을 갈거리라고도 하는데 거창 신씨에 의해 이루어진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마을은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가는 형세로 나는 기러기가 갈대를 머금어야 조화를 부린다 하여 마을의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영모정충효사 및 마을 어귀 노변에 신의련 효자각이 있다. 현재 신의련 효자문 옆에 노은공 유허비(蘆隱公 遺虛碑)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원노촌은 온통 신의련의 효성을 기리는 유적들로 채워진 곳이며, 여기에서 효 관련 설화들이 역사적 개연성을 띠고 진안 지역 전체로 구전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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