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35
한자 愼義連
이칭/별칭 의숙(宜叔),미계(美溪),신의연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정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1년연표보기 - 신의련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신의련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01년 - 신의련 효자각 건립
출생지 신의련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원노촌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송산재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효사 -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 갈거 마을 지도보기 북쪽 사당
사당|배향지 신의련 효자각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지도보기
유적비 미계 신선생 유적비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거창(居昌)

[정의]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의숙(宜叔), 호는 미계(美溪). 양렬공(襄烈公) 신이충(愼以衷)의 7대손이다.

[활동 사항]

신의련(愼義連)[1581~?]은 『진안지』에 의하면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병든 아버지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에도 병든 아버지 곁에서 간호하고 있었다. 어느 날 왜적이 쳐들어와 아버지를 죽이려 하였다. 신의련은 자기 몸으로 아버지를 가리고 울며 왜적에게 “내가 죽어도 좋으니 병든 노친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왜장이 효성에 감동하여 신의련의 이름을 물은 뒤 이름을 종이에 써서 태우니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놀란 왜장이 동구 밖에 ‘효자가 사는 곳[孝子所居之地]’이라는 방을 세워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5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고 그 들판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산을 덕태산(德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신의련의 일이 조정에 알려져 수의부의(修義副慰)의 품계와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각은 이후 일실되었고, 현재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에 남아 있는 효자각은 1801년(순조 1)에 세워진 것이다. 중수 내력은 자세하지 않는데, 건물은 기와 팔작지붕이며 효자각에는 미계 신선생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후에 신의련의 효행이 명나라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충효사에 배향되었으며 신기선이 유적비의 비명을 지었다.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 뒤 산기슭에 있는 거창 신씨 사당인 송산재에도 배향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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