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806
한자 元升吉神道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유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69년연표보기 - 원승길 신도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98년 - 원승길 신도비 이전
현 소재지 원승길 신도비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 마을 지도보기
원소재지 원승길 신도비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 대구평 마을
성격 신도비
관련 인물 원승길
재질 백색 대리석
크기(높이,너비,두께) 155㎝[높이]|47㎝[너비]|24㎝[두께]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석.

[개설]

원승길은 조선 후기의 의병으로 자는 평중(平仲),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 훈련 부정(訓練副正), 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동생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안산(安山) 덕물도(德物島)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때 원승길의 부인 구씨가 전란을 피해 진안군 상전면으로 들어와 은거하면서부터 자손들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1869(고종 6)에 이르러 후손들이 원승길을 기리는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건립 경위]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안산 덕물도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원승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869년에 후손들이 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 마을 앞에 있다. 원래 상전면 월포리 대구평 마을 뒤에 있었으나 용담댐 건설로 수몰의 위험에 놓이게 되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원승길 신도비가 있는 대구평 마을은 진안 사거리에서 ‘장수, 터미널’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진용로를 따라 400m 이동하다가 ‘무주, 안천’ 방면으로 좌회전해 진무로를 따라 8㎞ 이동해 수동 터널, 월포 대교를 지나 1㎞에서 대구평 마을 방면 우측 방향으로 직진하면 된다. 마을 입구에서 진무로를 따라 90m 이동하면, 앞쪽에 원승길 신도비가 있다.

[형태]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가첨석을 올려놓았다. 높이 155㎝, 너비 47㎝, 두께 24㎝이며, 재질은 백색 대리석이다.

[금석문]

비표(碑表)에는 ‘의혈 신도비(義絜神道碑)’의 글이 두전(頭篆)으로 새겨져 있으며, 이어서 방계 후손 밀양 부사 이세철(李世澈)이 지은 비문이 실려 있다. 비문의 내용을 국문으로 풀어서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희라! 천고에 남의 신하로 충절을 다하고 절의로 세운 사람은 한이 없고 또 훌륭하기도 하였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무과 선전관 훈련 도정 이조 참의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좌찬성 원릉군(原陵君) 원주 원공(原州元公) 휘 승길(升吉)평중(平仲)남계(南溪)인조(仁祖) 병자란(丙子亂)에 아우인 좌랑 휘 이길(頤吉)과 함께 아버지인 공조 판서 증포전적의순절형난공신(贈褒典迪毅殉節亨難功臣) 훈1등(勳一等) 의정부 영의정 겸령평원군(兼領平原君) 시호 충의(忠毅)성모(成模)를 따라 난리에 다다라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적들이 더욱 압박하여 정축(丁丑) 정월 13일 안산(安山)의 덕물도(德物島)에서 순절하여 훈1등에 책봉되었다. 상조(上祖)에서 계출(系出)하여 국자진사(國子進士) 지문하시중(知門下侍中) 휘 홍필(弘弼)을 거쳐 4대를 내려와서 대제학 원산군(原山君) 휘 황(滉)의 후예인 문과 행이조판서에 세자사(世子師)를 겸대한 휘 계검(繼儉)이 낳은 참찬공 휘 호영(虎英)의 손자이다. 세상을 빛낸 훈업(勳業)으로 드높이 해동(海東)의 명망 있는 씨족이 되었는데, 10대 사이에 충과 효로 정포(旌褒)된 사람이 대마다 끊이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근실하고 겸손하였는데, 충정공(忠貞公) 이홍주(李弘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일찍부터 문무(文武)를 익혔다. 효우(孝友) 절의(節義)하여 나가서는 공을 세우고 충의를 이뤘으며, 들어와서는 지조를 지키고 천성을 다하여 높은 행실과 큰 덕은 훌륭하고도 드러났다. 그 사실은 의정(議政) 찬성공(贊成公) 김간(金幹)이 지은 글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러나 병란을 겪은 뒤에 세대는 차츰 멀어지니, 그 행실과 덕성이 민몰하여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삼가 정원 일기(政院日記)와 묘지명(墓誌銘) 및 김공(金公)의 저술을 상고해 보니, 기특한 증거가 참으로 훌륭하고 감격스러웠다.

기사(己巳) 중추(仲秋) 상순에 방후손(傍後孫) 밀양 부사 세철(世澈)이 찬하다”

[현황]

원래의 신도비 옆에 오석으로 만든 비석을 세웠다. 새 비석에는 원 신도비의 전문을 국한문 혼용체로 풀이하여 다시 새겨 놓았다.

[의의와 평가]

원승길 신도비병자호란 당시 진안 지역의 의병사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이곳에 정착하였던 원주 원씨의 씨족사를 살피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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