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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21
한자 開港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혜영

[정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역사.

[개설]

19세기 중엽부터 조선 사회는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민중 세력의 힘이 성숙됨과 동시에 일본과 서구 열강 세력의 침투 및 일제 강점기에 직면하였다. 진안 지역은 이 시기 동학 농민 운동 준비 단계에서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의병의 중심지였다.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

1895년(고종 32) 5월에 반포된 칙령 98호에 의해 진안현은 진안군으로, 용담현용담군으로 개칭되어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지방 제도의 생소함과 불합리한 점으로 인해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행정 구역이 다시 개편되면서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14년 일제의 개편 조치로 용담군이 진안군에 병합되면서 진안군은 진안·상전·성수·백운·마령·부귀·용담·주천·동향·안천·정천 등 11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과 진안]

진안 지역은 동학 농민 운동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다. 1890년대에 진안군 백운면 오정리에는 전봉준의 직속 부관으로 알려진 전익호(全益鎬), 고부 출신으로 전봉준 휘하에 있었던 전동필(全東弼), 동학의 남원 접주였던 이사명(李士明) 등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에 동학의 간부들이 많았던 이유는 전봉준이 한때 마을에서 훈장으로 행세하며 은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안 지역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 전개 과정에서 용담 전투·상조림장 전투·진안 전투가 발생했다. 특히 전라북도 지역에서 최초로 일본군과 동학 농민군이 전투를 벌인 상조림장 전투에서는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고 전해지며, 진안 전투에서도 동학 농민군 수백 명이 전사하였다고 하니 진안 지역이 동학 농민 운동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진안의 의병 활동]

진안 지역에서는 1907년 이석용이 중심이 되어 호남 의병 창의 동맹이 조직된 후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으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문태수는 1907년 대한 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덕유산을 근거로 의병을 일으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활약했고 용담 지역에서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각 도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모여 13도 창의군을 편성할 때 호남 창의 대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유지명은 1907년 대한 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스스로 창의 대장·삼남 의병 대장을 칭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7년 9월 22일 용담 건무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그 뒤에도 용담·고산·은진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김동신은 금산·용담·전주 등에서 의병을 모은 후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활약하며 주변의 의병장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1907년 9월 15일 용담 내원사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석용의 의병과 통합하였으나, 통수권과 전략 등의 문제로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자 다시 분리하였다.

전해산은 처음에 이석용의 참모로 활동하였으나 1908년 5월에 이석용과 상의한 후 남하하여 7월에는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다. 그의 부대의 주력은 전라도 각지의 농민이었지만, 대한 제국 장교 출신인 정원집을 비롯하여 해산된 대한 제국 군대의 일부가 가담함으로써 강력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김봉조·김옥현·박경실·원용구·조진봉 등도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의병 부대에 종군하며 활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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