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17
한자 鎭安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대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2월 12일연표보기 - 진안 전투 발발
발생|시작 장소 진안 전투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동학 농민군|일본군|조선 관군

[정의]

1894년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관군의 전투.

[경과]

1894년 12월 10일 농산읍(農山邑)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동학 농민군이 진안 방향으로 퇴각하자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 중위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이를 포착하고 진안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이 고산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있는 진안의 동학 농민군을 사전에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12월 12일 오전 11시 진안현의 동쪽 끝에 도착하였다. 약 500~600명의 동학 농민군은 진안현의 서북쪽에 있는 산 위에 진을 치고 대기하다가 일본군을 발견하자 즉시 전투를 시작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과 1시간 가까이 교전하였으나 결국 퇴각하였고 오후 12시 10분 무렵에 일본군이 진안현을 점령하였다.

[결과]

진안 전투에 대한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동학 농민군의 전사자는 13명이었고 일본군 사상자는 없었다. 일본군이 노획당한 군수품으로는 불에 탄 화승총 70정·탄약 150관·한국돈 300냥·불에 탄 창 12자루·깃발 10폭·전신용 전선 2다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서는 일본군이 수천 명의 동학도를 만나 일대 접전을 벌였고,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진안 지역 근현대 민족 운동사 학술 보고서』에서는 현재의 진안 초등학교 뒷산과 성묘산에서 전투가 벌어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났으며, 동학 농민군 주도자는 자살하였고 300여 명의 동학 농민군이 체포당하여 진안 초등학교 뒷산의 밤나무 아래와 군하리의 제방 고목나무 아래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또한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전세일[혹은 전세도]이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으며, 그의 가족은 목이 없는 시신을 수습해 군상리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진안 전투에서는 동학 농민군 수백 명이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진안 지역이 동학 농민 운동을 준비하던 단계의 중요한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 농민 전쟁 전개 과정에서도 전라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최초로 전투를 벌일 만큼 상당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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