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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350
한자 臥龍庵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금평1길 10-8[주양리 135-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와룡암 건립
이전 시기/일시 1827년 - 와룡암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현 위치로 이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4월 1일연표보기 - 와룡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와룡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와룡암 -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금평1길 10-8[주양리 135-2]지도보기
성격 정자
양식 도리 기둥|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광산 김씨(光山金氏)
관리자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

[개설]

와룡암긍구당 김중정이 서울에서 이주하여 진안군 주천면에 은거하던 1654년(효종 5)에 유생들을 위하여 건립하였다. 250여 년 동안 많은 문인 학사들을 배출하였으며, 바로 옆에 있는 주천 서원의 강당 같은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위치]

와룡암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주천면사무소 동쪽 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주자천 변의 소(沼)에 용이 꿈틀거리다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와룡 바위 위에 있다.

[변천]

와룡암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1602~1700]이 서울에서 이주하여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에 은거하던 1654년(효종 5)에 유생들을 위하여 건립하였다. 그 후 250여 년 동안 많은 문인 학사들을 배출하였다.

김중정이 집필한 많은 저서는 여러 차례의 큰물에 휩쓸려 대부분은 유실(流失)되었다고 한다. 그가 세운 원래의 와룡암은 원래 주자천 건너편에 있었는데 물 때문에 오고 가기가 불편하였으므로 1827년(순조 27)에 김상원(金相元)이 지금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형태]

건물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추고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누각이다. 중앙에 전후퇴 형식의 방이 있고, 나머지는 마루이며, 방에는 4합문이 달려 있다. 주천 서원(朱川書院)의 강당 격으로 관리인의 집인 부속 건물 1채가 딸려 있다.

[현황]

와룡암에는 「기정(起亭)」·「와룡암(臥龍菴)」·「긍구당(肯構堂)」·「긍구당서(肯構堂序)」·「와룡암기(臥龍菴記)」·「와룡암 흥학계서(臥龍菴興學稧序)」·「와룡암 중수기(臥龍菴重修記)」·「주천사 중수기(朱川祠重修記)」·「주천 서원기(朱川書院記)」 및 많은 시액(詩額) 현판이 걸려 있다. 「기정(起亭)」과 「와룡암(臥龍菴)」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친필이고, 나머지 큰 글씨는 김기열(金箕烈)이 쓴 것이다.

와룡암은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관리인의 집인 부속 건물을 두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자는 풍경이 좋은 곳을 골라 자연을 즐기기 위해서 만들었다. 정자는 때로 후학들을 교육하기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와룡암도 단순하게 풍경을 즐기기 위한 것보다는 후학들을 교육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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