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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012
한자 李光弼
이칭/별칭 홍재(弘宰),귀락당(歸樂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이광필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이광필 경흥 부사 제수
성격 문인
성별
대표 경력 공조 판서

[정의]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산묘에 배향된 것은 후손들이 진안 지방에 세거(世居)하며, 이산묘 창건 당시부터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계]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홍재(弘宰), 호는 귀락당(歸樂堂). 문성공(文成公)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의 후예로 도사(都事) 이현산(李賢山)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이광필(李光弼)[?~?]은 1567년(명종 22)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재은 참봉(齋隱參奉)이 되었다. 1570년(선조 3)에 을사사화 때 화를 당했던 좌의정 유관(柳灌), 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의 신원 회복 노력이 있었는데, 이광필 또한 연명 상소에 동의하면서 사림(士林)을 극력 보호하려 노력하였다.

이후 1583년(선조 16)에 함경도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 해 1월부터 7월까지 이른바 ‘니탕개의 난’이 발발하였다. 여진의 침입은 조선 건국 이래 계속 반복되어 온 일이나 기껏해야 수백에서 3천을 넘지 않았으나 니탕개의 난은 최대 3만 명에 달하여 임진왜란 직전 조선 전기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변란이었다. 당시 여진족은 두만강 일대 6진의 일부인 경성과 종성 일대에 국한한 국지전을 벌렸는데 조선은 초반에 군사적 열세로 경원성이 함락되는 등 밀렸으나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결국 침입한 여진족들을 두만강 너머로 격퇴할 수 있었다. 이때 이광필 또한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 부령 부사(富寧府使) 김의현, 유원 첨사(柔遠僉使) 이박 등과 함께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일조하였고 공로로 관서백(關西伯)에 제수되었다. 이후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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