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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942
한자 成石璘
이칭/별칭 자수(自修),독곡(獨谷),문경(文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38년연표보기 - 성석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57년 - 성석린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03년 - 성석린 우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23년연표보기 - 성석린 사망
묘소|단소 성석린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산 30
사당|배향지 옥천사 -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녕(昌寧)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옥천사에 배향된 고려 말 조선 초기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 할아버지는 판도 총랑 성군미(成君美)이고, 아버지는 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이다. 어머니는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동생인 성석용(成石瑢)성석연(成石烟)은 각각 보문각 대제학(普文閣大提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석린은 순흥 안씨 안원숭(安原崇)의 딸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성지도(成志道), 둘째 아들은 성발도(成發道)이다.

[활동 사항]

성석린(成石璘)[1338~1423]은 1357년(공민왕 6) 진사시에 합격한 후 전교시 부령, 지인 상서, 예부 총랑 등을 역임하다가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 삼사 좌윤, 정당문학 등을 지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성군(昌成郡)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조선 건국 후 개성부 판사, 한성부 판사를 지냈으며, 1398년(태조 2) 문하시랑 찬성사 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서북면 도순찰사, 평양 부윤 등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 찬성사가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이 되고 창녕 부원군에 봉해졌다. 1402년(태종 2) 영의정 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1414년(태종 14)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23년(세종 5) 86세로 성석린이 사망하자 왕은 제문을 내리고 부의(賻儀)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790년(정조 14) 2월 지방관에게 명하여 묘소에 제사할 것을 청하는 건의가 있었고, 1799년(정조 23) 9월에는 태종 때 좌명공신에 책록된 서른여덟 사람의 손자들의 명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충훈부의 요청에 따라 유학(幼學) 성유완(成有完)의 명단이 올라가기도 하였다.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는 조선 1402년(태종 2)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삼등공신(翊戴佐明三等功臣)에 포상되었던 성석린에게 내려진 것이다. 현재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창녕 성씨 종중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3년 5월 7일 보물 제 746호로 지정되었다. 성석린 좌명공신 왕지가 진안에 남게 된 것이나 혹은 성석린의 위패가 진안 옥천사에 배향된 이유는 물론 성석린의 후손들 중 일부가 진안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4.13 오타 수정 1414년(태조 14) ->1414년(태종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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