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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924
한자 鄭光弼
이칭/별칭 사훈(士勛),수부(守夫),문익(文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62년연표보기 - 정광필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38년연표보기 - 정광필 사망
묘소|단소 정광필 묘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
사당|배향지 진안 이산묘 영모사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東萊)
대표 관직 영중추부사

[정의]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증조할아버지는 결성 현감 정귀령(鄭龜齡)이고, 아버지는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낸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이고 어머니는 장사랑(將仕郞) 이지지(李知止)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 이씨이다. 부인은 예조 정랑(禮曹正郞) 송순년(宋順年)의 딸 은진 송씨이다. 정광필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정노겸(鄭勞謙)은 남부 주부(南部主簿)이고, 정휘겸(鄭撝謙)은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정익겸(鄭益謙),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복겸(鄭福謙) 등이다.

[활동 사항]

정광필(鄭光弼)[1462~1538]은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 성균관 학유, 의정부 사록, 봉상시 직장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 뒤 이조 참판, 예조 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 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그 이듬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 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에게서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을 받았다. 신용개(申用漑)가 선비가 대신(大臣)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하여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정광필은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 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3년(중종 28) 파직되어 영의정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의정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중종의 장녀 효해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었는데, 이때 호곶 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조자 하였으나 정광필이 이를 제지하게 되어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유배되어 있은 지 여섯 달 만에 삼흉(三兇)[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을 말함]이 제거되었고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추부사가 되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정문공 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국조 인물고』에 의하면, 정광필이 숨을 거두자마자 신령스러운 광채가 지붕에서 곧장 하늘로 뻗쳐올라갔는데, 마치 무지개의 형상과 같았으므로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슬퍼하면서 3일 동안 철조(輟朝)·철시(輟市)하였고, 규정에 정해진 대로 부의(賻儀)를 내려주었으며, 잇따라 근시(近侍)를 보내어 상주(喪主)를 조문하고 치제(致祭)하였다. 동궁(東宮)도 이와 같이 하였다라고 한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문익(文翼)’이라 정하였다. 관청에서 장사를 거들어주어 4월에 광주(廣州) 성달리(省達里) 해좌 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종 초년에 보상(輔相)의 공적을 논하여 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회덕서원과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司)에 향사되었다.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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