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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29
한자 南學運動
분야 역사/근현대,종교/신종교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 남학 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895년 4월 27일 - 남학 운동 종료
성격 사회 운동|종교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운규|이용래|이용신|김치인|김원배|김용배|남학|광화교|금강 불교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남학 교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사회 운동.

[개설]

남학 운동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자 후천개벽의 시운이 도래했다고 여긴 진안 지역의 남학(南學) 교도 수천 명이 모여 전개한 사회 운동이다. 남학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로부터 시작하여 부연(芙蓮) 이용래(李龍來)와 일수(一守) 이용신(李龍信)을 거쳐 광화(光華) 김치인(金致寅)으로 계승된 신종교이다.

[역사적 배경]

남학 운동은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던 19세기에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여 후천개벽의 시운을 열고 민생의 어려움을 위무하면서 궁극적으로 국가의 태평성대를 도모하였던 일부 사상가들이 주도한 종교·사회 운동이었다. 진안 지역에서는 1894년 김치인을 중심으로 남학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경과]

남학의 창시자인 이운규가 진안 지역에 거처하면서 이용래와 김치인을 중심으로 남학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운규와 그의 아들 이용래·이용신이 진안 지역에서 생활하던 1860년대 말에 10대 후반의 청년이었던 김치인은 그들의 사상을 접한 후 수도를 시작하였다. 그는 종교적 신념과 도덕적 윤리를 토대로 어려운 민생의 구심적 역할을 하면서 태평성대를 열고자 하였다.

1893년까지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치인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자 수천 명에 달하는 남학군을 조직하여 사회 운동을 통해 창생을 구제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관군의 습격을 받고 김치인을 비롯한 간부들이 체포되어 1895년 4월 27일 전주의 서문 밖에서 교수형에 처해짐으로써 남학 운동은 종결되었다.

[결과]

남학 운동은 거사 전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김치인의 종교 사상은 이후 김원배의 광화교 및 김용배의 금강 불교 등으로 계승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학 운동은 19세기 말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한 진안 지역 민중의 자발적인 사회 운동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남학 운동을 통해 민중들이 혼란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고 삶을 영위하였는지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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