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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시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구미 지역의 3·1운동은 3월 12일 진평동에서 시작되어 약 한 달 동안 전개되었다.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은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 동안 4차례에 걸쳐 적게는 20~30명에서부터 많게는 200여 명이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6개월 이상 감옥 생활을 한 인사만도 25명이나 되었다. 또 4월 3일 해평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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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경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상백 등과 함께 진평동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져와 마을의 유지 이상백 등에게 전달하였는데, 권경보는 이상백 의 만세 운동 권유를 받아들여 거사일을 3월 12일로 정하고, 3월 11일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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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영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상백 등과 함께 진평동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약 20매를 가지고 진평동에 사는 이상백(李相柏)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권영해는 이상백의 권유를 받고 이범성(李範成)·이내성(李乃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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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권영우(權寧禹)이며,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권오환(權五煥)은 1919년 4월 12일 선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인 선산(善山)에서는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4월 12일 선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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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권상근(權相瑾)이며,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권쾌복은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1941년 2월 15일 같은 학교 학생 문홍의(文洪義)·배학보(裴鶴甫) 등과 함께 항일 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어 있던 비밀결사 문예부·연구회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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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관묵(金寬默)은 김태동(金太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직부(直夫), 호는 경재(敬齋)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으로 이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가조면에서도 3월 20일 장기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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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언론인이자 학자. 김규환(金圭煥)은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매암(梅巖) 김동석(金東錫)과 어머니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서울대학교 신문학과 교수로서 학계뿐 아니라 한국신문학회와 국제신문인협회 등에 관계하여 한국의 언론계의 발전을 주도하였다. 김규환은 1947년 서울대학교 예과를 수료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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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도길(金道吉)은 1919년 3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진평동의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져와 마을 유지 이상백(李相柏)과 상의하면서 추진되었다. 이상백과 김도길 등은 3월 12일 오후 8시 200여 명의 주민들을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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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동석(金東錫)은 호가 매암(梅巖)이며, 순충공(順忠公) 김선궁(金宣弓)의 32세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장사랑 김지복(金志複)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참판 김기열(金基烈)이다. 할아버지는 숭인전참봉 김진규(金鎭奎)이며, 아버지는 농산중추원참의관 김희수(金熙洙)이며, 어머니는 단양장씨(丹陽張氏) 장옥선(張玉善)이다. 김동석은 대구협성학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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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윤은 이영식, 이상백 등과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3월 11일에 진평동 이상백 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3월 12일 밤 8시경 동민 200여 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주동 인물 일부가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다. 그러나 3월 13일 오후 4시경 같은 장소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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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일선. 자는 응종(應鐘)이고, 호는 동은(東隱). 찰방 김취련(金就鍊)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재돈(金載敦)이다. 김수호는 동지들과 신간회(新幹會)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고, 일본 경찰의 주요 감시 대상 인물로 지목되었다. 광복 후에는 분열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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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항일운동가. 김영득은 호는 유영(幽影)이며, 아버지는 김현묵(金賢默)이다. 김영득은 구미보통학교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이갑기 등 학우들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다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5년 3월 졸업하였으며, 이후 문예 활동을 통한 민중 계몽 운동에 전념하였다.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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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화가이자 학자. 1904년 구미시 선산 지역에서 태어났다. 호는 근원, 선부, 검려, 우산, 노시산방주인 등이다. 김용준은 1925년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재능을 나타내었고,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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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의경(金義景)은 권오환(權五煥)·이원길(李元吉)·박희목(朴喜穆)·전용신(田容信)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펼칠 것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2일 선산읍 장터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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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정묵(金正默)은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 북경서성중국대학(北京西城中國大學) 정치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15년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중국 동삼성(東三省) 장작림(張作霖) 휘하 곽송령(郭松齡) 부대에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8년 밀입국하여 장진홍(張鎭弘)과 독립운동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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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종철(金鍾哲)은 도개면 다곡리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 졸업 후 1944년 9월 20일 일본군에 강제 징병되어 평양에 주재하는 일본군 제44부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일본군 회부대(檜部隊)의 보충병으로 중국 한구(漢口)로 이동 배치되었다. 일본군을 탈출하기 위해 은밀히 중국어를 익히고 주변 지리를 파악하며 탈출 계획을 준비하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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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흑구(黑鷗). 아버지는 남경희(南景熙)이며, 어머니는 용궁전씨(龍宮全氏)이다. 남상순(南相淳)은 무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부설 대판중학교(大阪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41년 9월 전영수(田永秀)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청년학생이 주동이 되어 독립을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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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도선굴 암벽 두 곳에 새겨진 글자.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석통로(穿石通路)라는 내용의 도선굴 통로 왼쪽 수직 암벽에 새긴 암각문이고, 다른 하나는 도선굴 내부 돌출된 벽 위에 고정시킨 금오산 굴 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제목의 직사각형 판석(板石)의 명문(銘文)이다. 금오산 굴은 금오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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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다카키 쇼오지[高木昌治]의 칭송비. 다카키 쇼우지는 일본인으로서 인동우체국 근처에서 살았다. 인동 지방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잘 알려진 그는 곡물상을 운영하였는데, 특히 함경도까지 왕래하면서 조를 많이 취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6년부터 흉년이 계속 들어 기근이 심했을 때, 곳간을 열어 빈민들을 구제해 주었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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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6월 최재화가 주동이 되어 경상북도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보낸 사건.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은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해평 산양리의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1919년 4월 2일 밤 동민들을 이끌고 고향인 해평경찰서(海平警察署)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또한 대구로 나가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김수길(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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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6·25전쟁 시 국군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渡河)를 저지하기 위해 비산진에서 벌인 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6월 28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 대전(大田)을 장악한 뒤, 8월 15일까지는 낙동강 선을 넘으려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7월 말 북한군 제15사단(총병력 약 5,000명)은 낙동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상주(尙州) 정면에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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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에서 일어난 반봉건(反封建) 농민항쟁. 구미시 선산은 18세기 이래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유통경제가 발달하는 추세 속에서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였다. 선산에서는 쌀과 면화 및 면포가 상품화되어 경상도는 물론, 물길로 서울·강원도·충청도·함경도까지 판매되었다. 쌀과 면포 외에 마포·콩·보리 등도 상품화되어 장시에서 거래되었다. 이 같은 상업적 농업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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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국가와 향토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운 민병.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진을 침략하면서 북상하자 구미 선산에서는 노경임(盧景任)을 대장으로 하는 선산향병(善山鄕兵)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들이닥치면서 곧 무너졌다. 그리고 해평 출신 부안현감 고한운(高澣雲)이 군졸과 흩어진 의사들을 모아 금오산성에서 진을 치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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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허위의 구국 의병투쟁.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가 하면, 조선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두발과 복장의 형태마저 강제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단발령(斷髮令)과 변복령(變服令)이다. 일찍부터 일본과 서양을 금수(禽獸)로 여겼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