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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 김담(金譚), 아들 김경황(金景滉)·김경시(金景時) 형제, 손자 김한(金垾) 등 삼세사효자의 행실을 기록한 글. 김담, 김경황·김경시, 김한 등은 강릉김씨로 3대에 걸쳐 4명의 효자였다. 이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삼세사효자(三世四孝子)의 행실을 기록하여 정려각에 걸었다. 송시열이 관동지역을 유람하면서 강릉에서 삼세사효자의 효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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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저동 소재 금란정(金蘭亭) 건립 내력을 적은 기문. 금란정은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의 계회 모임 장소로 활용되는 정자로 경포대 북쪽 호숫가에 있다. 「금란정실기(金蘭亭實記)」는 계원 심철한(沈哲漢)이 작성한 것으로 이 정자의 매입과 중수 내용을 한문으로 적어 정자에 걸어놓았다. 크기는 가로 77㎝. 세로 31㎝이고 나무로 만든 현판이다. 옛날 백연당(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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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김담(金譚)의 행적과 효행을 찬(撰)한 서문(序文). 「서김효자행실(序金孝子行實)」은 원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지어 현판에 새겨 걸었는데, 훼손되자 1933년 13세손 김익성(金益成)이 다시 새겨 걸었다. 현판은 가로 96㎝, 세로 29㎝이다. 봉래 양사언이 김담의 효행을 칭찬하고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서술하였다. 김효자의 효행을 먼저 기록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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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김몽상(金夢相), 김몽상의 처 강릉김씨, 김석진(金錫晋), 김석진 처 강릉최씨, 김구(金坵) 등 삼세삼효이열(三世三孝二烈)의 효열 행적을 기록한 정려 기문. 「안동김씨 삼효이녀려기(安東金氏三孝二女閭記)」는 강릉시 교2동 "안동김씨 삼세삼효이열지각(三世三孝二烈之閣)" 안에 있다. 제목은 '효열각 행적기(孝烈閣行蹟記)'이다. 이 효열각 행적기는 18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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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김몽상(金夢相), 김몽상의 처 강릉김씨, 김석진(金錫晋), 김석진 처 강릉최씨, 김구(金坵) 등 삼세삼효이열지려각(三世三孝二烈之閭閣)의 중수 사실을 적은 기문. 「안동김씨효열각중수기(安東金氏孝烈閣重修記)」는 강릉시 교2동 안동김씨 삼세삼효이열지각(三世三孝二烈之閣) 안에 있다. 「안동김씨효열각중수기」는 1941년 8세손 김재남(金在南)이 짓고, 김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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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시조는 최흔봉(崔欣奉)으로 고려 태조의 부마가 되어 대경(大卿)을 지냈다. 입향시조 최입지는 최흔봉의 12세손이며 산수재(山水齋) 최릉(崔陵)의 아들로 1275년(충렬왕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원군(江陵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강릉을 관향으로 삼았다. 후손들이 평장사(平章事)를 연이어 하였다고 하여 평장최씨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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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강릉 사람인 효자 김덕장(金德璋)의 효행을 적은 효자비. 이 비석은 조선 중종 때 강릉 사람 김덕장(金德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세웠다. 김덕장은 어릴 적부터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살던 중, 하루는 산불이 나서 묘소에까지 이르자 통곡하며 하늘에 비니 돌연 비바람이 일어나 산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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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校理) 곽거완(郭居完)을 추모하기 위해 1972년에 건립된 사당(祠堂). 사천면 노동리에서 운전면허시험장으로 향하는 도로 우측 산기슭에 위치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벽돌담이 쌓아져 있다. 태극모양과 연화문으로 단청된 솟을대문에는 ‘입덕문(入德門)’이란 현액과 봉안문(奉安文)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 우측에는 경덕사기적비가 있다.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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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위패를 모신 사당. 강릉시 저동길 113[저동 293번지]에 있는 강릉박씨대종회 소유의 경양사는 신라 일등공신 관설당(觀雪堂) 박제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박제상은 417년에 눌지왕의 명을 받고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동생 복호(卜好)를 데려 왔고, 다음에는 일본에 가서 볼모로 잡혀 있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신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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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권처평(權處平)의 처 강릉 최씨의 열행(烈行)을 기록한 비 권처평 처 강릉최씨는 진사 최해문(崔海文)의 딸로 임진왜란을 당하자 적소에서 핍박을 피하여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때 권처평의 동생 권처직(權處直)의 부인 김씨도 함께 핍박을 피해 투신하였다. 아들 권덕유(權德裕)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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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화(權和)[1539~1573]의 묘비. 권화(權和)의 자는 희혜(希惠), 호는 습독(習讀)이다. 권화(權和)는 연곡에 무진정(無盡亭)을 짓고 정자 주위를 거닐며 보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는 이종사촌간이다. 묘비가 오래되어 훼손되자 후손 권학수(權學洙) 등이 율곡 이이가 찬한 묘지명과 가승을 근거로 1884년(고종 21)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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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나 청동 등 쇠붙이나 석재(石材)에 기록한 글씨나 그림. 금석문이란 고대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보통 금속에 새겨진 문자와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는 나무에 새겨진 문자나 토기에 기록한 토기 명문(銘文),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씨로 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나 전돌의 명문(銘文)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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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광철(金光轍)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김광철의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헌납(獻納)을 지낸 김대(金臺)의 후손이다. 후손 김한성(金漢星) 등이 묘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후세에 전했으나 세월이 지나 마모되어 그 행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1931년 다시 건립하였다. 김광철의 묘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핸다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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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효자인 김담(金譚)[1522~1605]의 효행을 기리는 묘비. 김담의 자는 담지(譚之), 호는 보진재(齋眞齋), 본관은 강릉이다. 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 보진재공(葆眞齋公) 노암파(魯巖派) 파조(派祖)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김담의 효행을 천거하며 시를 지었다. 사후에는 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삼강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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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김덕장(金德璋)은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으로 1550년(명종 5년)에 강릉에서 태어났다. 무공랑행평강훈도(務功郞行平康訓導)였던 김덕장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석에 들었을 때는 단 한 번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고, 아버지가 위독했을 때 손가락을 끊어 생피를 올리기도 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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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임경(任卿). 김주원의 후손이며, 5대조는 김윤신(金潤身), 고조는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 김세달(金世達), 증조는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김광언(金光彦), 할아버지는 군자주부(軍資主簿) 김수(金鐩), 아버지는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참의(參議) 장호(張昊)의 딸이다. 부인은 간재(艮齋) 최연(崔演)의 후손인 최유성(崔有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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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득의(金得毅)[1595~1653]의 묘비. 김득의는 강릉김씨로 자는 임경(任卿)이다. 김주원의 후손이며, 5대조는 괴당(槐堂) 김윤신(金潤身)이다. 김득의의 묘비는 1818년(순조 18)에 세워졌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리 김득의의 묘 앞에 있다. 안인 대동마을에서 영동화력발전소 사원 사택을 지나자마자 우측 야트막한 산에 있다.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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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지봉(芝峰) 김몽호(金夢虎)[1557~1637]의 가계 및 행적을 기록한 묘비. 김몽호는 본관이 강릉이고 김주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수(金鐩)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몽호의 손자인 김시혁(金始爀)과 김시형(金始炯)이 세웠다. 김몽호의 묘가 대관령 넘어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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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무신인 김여명(金汝明)의 묘비. 강원도 강릉시 저동 숭덕재 근처의 김윤신 묘 앞에 김윤신 신도비와 함께 있다. 화강석 재질의 방형비좌 위에 오석 재질의 비신이 놓여 있다. 비신의 높이는 96㎝, 비신 너비 42.5㎝, 비신 두께 5.5㎝이다. 비문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兼)를 지낸 최응현(崔應賢)이 짓고,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권적(權迪)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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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인 김윤신(金潤身)의 묘비. 김윤신(金潤身)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강릉 출신이다. 호는 괴당(槐堂), 자는 덕수(德叟)이다. 금란반월회를 창계했던 인물 중에 한사람이다. 김윤신 사후에 후손인 판서(判書) 김상익(金尙翼), 김형진(金衡鎭) 등이 주도하여 비를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강릉김씨 옥가파 종산(宗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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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김응일(金應一)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김응일[1598~1660]의 자는 덕문(德文),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3년간 율봉찰방(栗峯察訪)을 역임하면서 풍흉에 따라 조세를 거두고 구휼을 지극히 하였다. 아버지 난사공(煖沙公) 김경윤(金景潤)이 기침병이 들자 엄동설한에 석청(石碃)과 석회(石灰)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3일간 기도하였다. 이때 꿩이 소리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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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인 김이려(金以礪)의 묘지석(墓誌石). 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묘지명이다. 김이려의 자는 성지(成之), 본관은 강릉이다. 조부는 찰방을 지낸 김석견(金石堅), 아버지는 교수를 지낸 김보(金黼)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신(權伸)의 딸이다. 김이려는 1487년(성종 18)에 출생하였으며, 1552년(명종 7)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참봉 김세달(金世達)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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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인(金訒)의 묘지석(墓誌石). 김인[1516~1571]의 자는 대인(大仁)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김주원의 후손이다. 증조는 증통정대부 예조참의 행봉정대부 사간원헌납(贈通政大夫 禮曹參議 行奉正大夫 司諫院獻納)을 지낸 김대(金臺), 할아버지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봉정대부 종부시첨정(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奉正大夫 宗簿寺僉正)을 지낸 김세훈(金世勳),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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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자흠(金子欽)의 신도비. 김자흠은 1444년(세종 26)에 과거에 올라 수직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김자흠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두호미(豆乎彌)에 있다. 화강암 비좌, 비신, 지붕돌[옥개석]로 만들어졌으며, 전체 높이는 272.5㎝이고 비신의 폭은 82㎝이다. 1971년에는 후손들이 신도비각을 건립하였다.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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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밀양박씨 정재공파의 낙향시조인 박계립의 신도비. 박계립(朴啓立)은 고려밀성부원군대제학보조공신(高麗密城府院君大提學輔祚功臣) 정재공(貞齋公)의 후손이며, 밀양박씨 정재공파 북동대종중(密陽朴氏貞齋公派北洞大宗中)의 낙향 시조이다. 박계립의 호는 눌암(訥庵)이다. 김제 흥복동(興福洞)에서 1620년(광해군 12) 아버지 진사 박지봉(朴芝鳳)과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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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수량(朴遂良)[1474~1546]의 묘비. 삼가 박수량은 1474년(성종 6) 강릉에서 출생한 인물로 현량과에 피천되어 용궁현감을 지냈다. 1814년(순조 14) 박수량의 행적을 기리고 후대에 보전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방동하리 박수량 효자각 안에 효자비, 효자각기와 함께 있다. 효자각 옆에는 쌍한정이 있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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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事蹟)을 기념하기위해 세우는 돌. 비(碑)는 보통 비석 혹은 석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석비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석비는 묘비와 탑비·능묘비 외에도 비문의 내용이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석비의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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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운(崔致雲), 최응현(崔應賢), 최수성(崔壽峸)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 강릉최씨[필달계] 종중에서는 조은(釣隱) 최치운, 수헌(垂軒) 최응현, 원정(猿亭) 최수성을 최씨삼현(崔氏三賢)이라 칭송한다. 이에 삼현의 신도비를 함께 보관하고 있는 비각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강릉최씨[필달계] 종중에서는 1957년 최수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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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서원의 건립내력과 사적을 기록한 비. 송담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을 배향한 곳으로 1630(인조 8년)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비문에는 율곡 이이의 행적과 외가에 대한 내용 그리고 서원의 창건과 이건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율곡 이이를 배향한 서원의 사적을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 율곡 이이의 후학들인 지역 유생들과 문인들이 건립하였다.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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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흠(季欽), 호는 송정(松亭). 고려 때의 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증조는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할아버지는 신자승(申自繩), 아버지는 신숙권(申叔權),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부인은 이사온(李思溫)의 딸 용인이씨이다.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첫째는 장인우(張仁友)의 부인, 둘째는 이원수(李元秀)의 부인인 신사임당(申師任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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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명화(申命和)의 묘소 앞에 세운 비석. 신명화는 중종 대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류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었다. 외손인 율곡 이이와 오죽헌(烏竹軒) 권처균(權處均)이 신명화의 묘를 강릉부 북쪽 두왕동(豆旺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조산리로 이장한 이래 외손들이 봉사(奉祀)한다. 1885년(고종 22) 외손인 권인식(權麟植) 등이 신명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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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응란(沈應蘭)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 심응란[1790~1836]의 자는 경언(景言), 본관은 삼척,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심기영(沈耆永)의 아들이다. 심응란은 어버이의 병이 위독하자 낮에는 의원을 불러 치료하고, 밤에는 하늘에 어버이 대신 자신이 앓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어버이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기에 하늘에 절하고 조용히 빌었더니 문득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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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이씨(寧海李氏) 이성무(李成茂)·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良茂) 등 4형제와 이당(李堂)·이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영해이씨의 효자각에는 6기의 비가 보존되어 있다. 6기의 비석은 이성무(李成茂)·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良茂) 등 4명의 형제와 이당(李堂)과 이민 2명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이다. 4형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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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서원(五峯書院)의 건립내력과 연혁을 기록한 기적비(紀蹟碑). 오봉서원에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한 후 그 건립시기 이후부터의 내력을 적어 기적비를 세웠다.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오봉서원 앞 기적비각 안에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12㎝, 비신 높이 161㎝, 비신 너비 67㎝, 두께 14㎝이다. 비신은 오석이고 비좌와 비두는 화강석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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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서원 건립 배경과 내력 그리고 제향인물 등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 공자 진영의 봉안 인물과 과정 그리고 서원의 건립과정, 주자와 송시열의 제향 등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우암 송시열을 추배한 사실을 추가로 기술하여 1856년(철종 7) 강릉 지역 유림들 뜻을 모아 새로 세웠다.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오봉서원 앞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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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이름·생일·죽은 날·자손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묻은 판석. 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아버지는 최수당(崔壽塘)이고 어머니는 비인현감(比仁縣監)을 지낸 신수(辛守)의 딸이다. 조부는 통훈대부금구현령(通訓大夫金溝縣令)을 지낸 최세충(崔世忠)이고, 증조는 가선대부형조참판(嘉善大夫刑曹參判)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이다. 이무강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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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신라 말 잠시 강릉에 정착했던 장정필(張貞弼)의 행적을 적은 묘비. 장정필의 자는 영보(寧父), 호는 포음(圃蔭)이다. 장정필은 당나라 소종(昭宗) 898년에 태어나 5살 때 변란을 만나 아버지 대사마공(大司馬公) 장원(張源)과 함께 신라로 피신 와 10여 년 동안 살다가 떠났다. 이후 다시 사신으로 왔다가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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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전성명(全性命)의 묘비. 전성명의 자는 호천(浩天), 호는 신암(愼庵)으로 신라전법판서(新羅典法判書) 전훤(全愃)의 후손이다. 증조(曾祖) 전우정(全遇禎)은 성균생원이었고, 할아버지 전륜(全崙)은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냈으며 아버지 전민행(全敏行)은 통덕랑행정선훈도(通德郞行旌善訓導)를 지냈다. 전성명은 기자전참봉(箕子殿叅奉)과 희릉참봉(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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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운(崔致雲)의 아내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씨(咸氏)의 묘비. 정경부인 함씨는 함세린(咸世麟)의 딸로 1392년 출생하였고 천성이 정숙하였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21살에 최치운에게 시집왔으며 시댁에서도 효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서거정이 비문을 지었으나 비석을 세우지 않아 소실되었다. 그러나 9세손 최정태(崔挺泰)가 우연히 두타산 삼화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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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최세창(崔世昌)의 부인 강릉김씨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旌閭). 강릉최씨(江陵崔氏) 최세창의 처 강릉김씨는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남편에게 지극히 순종하였다. 남편이 죽자 며칠 동안 남편의 시신을 껴안고 자신도 따라 죽을 결심을 하여 치마 한 폭을 찢고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의 관에다 넣고 손가락의 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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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강릉 12향현의 한 사람인 최수(崔洙)의 행적을 적은 묘비. 최수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춘헌(春軒)이며, 강릉 출신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유명하다. 통훈대부진잠현감(通訓大夫鎭岑縣監)을 지냈으며, 금란반월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으로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후손 최시복(崔始復)과 최주학(崔柱鶴)이 잘 전해지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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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의 신도비. 강릉최씨 필달계 종중에서 최수성의 행적을 보존하고 추모하기 위해 1957년에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 입구에 있는 삼현비각 내에 있다. 삼현비각 서북쪽 산록은 강릉최씨 필달계 선영으로 보은에서 이장해 온 최수성의 묘소도 함께 있다. 방형 비좌에 오석 비신이며, 지붕돌[옥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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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 최응현 신도비는 1687년(숙종 4)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에는 신도비문 작성 경위,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의 상계와 조상의 공적, 수헌공의 행적과 후손들의 행적, 그리고 비명(碑銘)이 기록되어 있다. 최응현의 묘소에 비가 있었으나 오래되어 마모되자 후손들이 최응현의 행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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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강릉최씨 입지계의 시조인 최입지의 신도비. 최입지(崔立之)는 강릉최씨 입지계의 시조이다. 최입지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다. 1844년(헌종 10)에 후손 최종태(崔鍾泰)·최양호(崔養浩) 등이 종인들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최입지 묘 근처에 있다. 비좌와 비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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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자점(崔自霑)[1434~1508]의 묘비. 최자점의 자는 자흡(子洽), 호는 괴헌(槐軒), 부마(駙馬) 최문한(崔文漢)의 증손이며 직장(直長) 최윤(崔沇)의 아들로 1465년(세조 11)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 고성군수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교1동 강릉시외버스터미널 북쪽 산록에 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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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남(崔忠南)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 최충남[1566~1616]의 자는 신부(藎夫), 본관은 강릉, 최문한(崔文漢)의 후손이다. 최충남의 나이 8살 때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1796년(정조 20)에 7세손 진사 최구현(崔九鉉)이 선조의 효행을 전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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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치운(崔致雲)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강릉최씨 필달계 후손으로 조선 세종 조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의 상계(上系) 및 혼인관계, 출생과 관직경력, 후손, 명문(銘文) 등을 기록한 것으로 최치운의 아들 최진현(崔進賢)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 강릉최씨 필달계 선영에 있는 최치운의 묘 앞에 있다. 비석의 총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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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최치운의 자는 백경(伯卿)이고, 호는 경호(鏡湖)·조은(釣隱)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이다. 1408년(태종 8)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412년(태종 12)에는 향유(鄕儒) 68인과 더불어 강릉향교 중건을 건의하는 공장(供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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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록(崔應祿)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최응록은 중종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효행이 지극하여 정릉참봉(定陵參奉)에 천거되었다. 최응록의 호는 성재(省齋)이다. 희경공(僖景公) 좌찬성(左贊成) 최이(崔迤)의 6세손이고 아버지는 최숙남이다. 최응록은 아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다 섞어 드시게 하여 병을 낳게...